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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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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5 김광근 - 내 생각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잠언 3장 5-6절우리는 매 순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내 경험. 내 계산. 내 판단이 삶의 나침반이 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구요. 이것은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내 생각을 더 앞세우는 삶을 경계하시는 것입니다베드로는 밤새 그물을 던졌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어부인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여길 수 있었습니다그러나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그 한 마디의 순종이 기적의 문을 열었습니다하나님의 역사는 내 경험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될 때가 많습니다"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재정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 그것이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버리심이 아니고 지연이 실패가 아님을 믿는 것이 진정한 신뢰입니다당신은 지금 마음속에 꽉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고집. 내 계산. 내 두려움!. 그것을 오늘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내 길보다 주님의 길이 늘 옳습니다.' 그 고백 위에서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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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80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숨을 쉴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며칠 전 한 장면이 오래 남았다. 많은 인기를 누리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의 고백이었다. 겉으로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는데, 오히려 행복해 보였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는데, 정작 본인은 “숨이 안 쉬어졌다”고 말한다. 버티고, 견디고,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서 더 이상 숨이 들어오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말한다.최근 한국 TV 유퀴즈온더블럭에 출연한 남매가수 악뮤(악동뮤지션)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동생 이수현은 긴 슬럼프 속에서 무대 위조차 숨이 막히는 공간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오빠 이찬혁은 그 시간을 버티게 한 방식이 ‘해결’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것’이었다고 보여준다. 핵심은 단순하다. 사람은 정답으로 살아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숨 쉴 수 있는 관계가 있어야 다시 살아난다.그러면 교회에 적용해 볼 때, 교회는 숨 쉬는 공간인가?이 질문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교회는 과연 숨 쉴 수 있는 곳인가.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사람들은 여전히 교회 안에서 자신의 상태를 감춘다. 힘들다는 말 대신 괜찮다고 답하고, 무너졌다는 고백 대신 침묵을 선택한다.이유는 명확하다. 말해도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칼럼에서 강조했지만, 교회는 종종 너무 빨리 답을 내린다. 누군가의 고통을 들으면 공감보다 해석이 먼저 나온다. 기도해라, 믿음으로 이겨라, 하나님의 뜻이 있다. 분명히 이 말들은 틀리지 않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 숨이 막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설명이 아니라 공기다. 공감 없는 진리는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오히려 더 깊은 침묵으로 밀어 넣는다.악뮤의 또 다른 고백은 의미심장하다. 이제는 서로 달라졌기 때문에 매일 대화하지 않으면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관계는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멀어진다.교회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고 해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같은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말하지 않으면 오해가 쌓인다. 듣지 않으면 관계는 끊어진다. 결국 사람은 떠난다. 이 지점에서 교회는 근본적인 착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함께 있음’이 ‘연결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그들 남매가 방송에 나온 이유 중 하나는 “한 줄을 기록하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다는 욕구다.여기서 교회는 질문을 받아야 한다. 교회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있는가. 대부분의 공동체는 결과만 공유한다. 회복된 이야기, 정리된 간증, 완성된 결론만 남는다. 그것도 대부분의 결과는 성공과 축복의 내용 뿐이다. 그러나 실제 삶은 진행 중이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 여전히 흔들리는 믿음, 끝나지 않은 고통이 더 많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교회 안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교회 밖에서 풀어낸다. 그래서 교회는 점점 더 형식적인 공간이 된다.소통은 단순한 대화 기술이 아니라 삶을 함께 짊어지는 태도라는 사실이다. 또한 사람의 내면 깊은 허기를 함께 나누지 못할 때, 공동체는 표면적인 연결에 머무르게 된다. 결국 남는 것은 ‘함께 있음’이 아니라 ‘혼자 버티는 구조’다.소통하는 교회는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다. 오히려 말할 수 있는 교회다. 차이는 분명하다.첫째, 공감이 먼저다. 가르치기 전에 듣고, 판단하기 전에 이해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둘째, 약함이 허용된다. 흔들림을 드러내도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 입을 연다.셋째, 의도적인 대화가 있다. 관계는 노력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다. 반복적인 질문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넷째, 과정이 공유된다. 완성된 이야기만이 아니라 진행 중인 삶을 나눌 때 공동체는 현실과 연결된다.이 네 가지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결국 결론은 하나다. 교회는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의 상태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곳,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꺼낼 수 있는 곳, 정답이 없어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곳. 이것이 회복되지 않으면 교회는 ‘버티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사람은 버티는 곳을 떠난다.그러므로 소통은 선택이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이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아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요즘, 정말 괜찮으세요” 이 질문을 진심으로 던지고 끝까지 듣는 것. 그 순간, 누군가는 다시 숨을 쉰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교회는 다시 교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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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9
    [오피니언] 주성철 컬럼 - 말세지말에 사는 우리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우리가 모두 다 잘 알다시피 호르무즈 해협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동안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는 유조선과 기타 화물선의 통과를 제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미군 함정이 그곳을 지키므로 수뢰를 걷어내고 있다. 이란은 더 이상 자신들이 뭘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특히 지하 도시를 사람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거대하게 지어놓고, 이란 혁명수비대를 모두 생매장했다. 이란의 커다란 실수는 지하 도시에 들어가는 입구를 마련해 놓았지만, 미국이 B2 폭격기로 입구를 공격해서 무덤을 만들어 놓았다. 전자 장비를 비롯해 이란군 총 지휘본부, 레이더 및 기타 전산 모두가 파괴되어 지상과 연락이 끊겨 버렸습니다. 산소도 부족한 가운데 죽을 날 만 기다리는 사람이 수천이나 된다고 한다. 이란 현 정부는 미국에 완전히 무릎을 꿇었고 협상해서 그동안 묶여있던 자금을 풀어준다는 조건으로 협상했다고는 하지만,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사실무근인 이야기라고 하며 대립하고 있다. 그러면 앞으로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 우선 북한을 생각 안 할 수 없다. 국력을 비교해 봐도 인구수를 생각해 봐도 핵만 빼놓고는 이란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세계는 판단하고 있다. 이란은 그저 지하 20미터나 30미터만 생각했지, 미국이 입구를 파괴하여 모두 매장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다. 북한도 이제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제아무리 지하 도시를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 놓았다 하더라도 미국의 공격을 피할 수 없다. 이란의 경우 미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지하 도시의 조감도를 비롯해서 무기 창고, 탱크 저장소, 등등을 인공위성을 통해서 시간, 분, 초 단계로 그들의 행동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란 혁명수비대가 그 지하 도시에 모두 들어가기 까지 기다렸다가 폭탄을 투하한 것이다. 미국은 이미 북한은 손바닥 보듯이 모두 파악하고 있다. 북한이 지하도시 구조를 세계 그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도록 만들어 놨지만, 미국은 이 모든 것을 인공위성과 CIA 정보로 세심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불안한 것은 미국은 대한민국의 좌파 정부와 기밀을 공유하지 않겠다고 했고, 지난 2026년 4월 초 (6일부터 8일 사이), 신형 무기 체계들을 시험하며 “집속탄(Cluster Bomb)”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을 실험한 바 있는데, 대한민국을 모르고 있고 이 일에 대하여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직접 북한에 직접 경고했다.또한 최근에 그런데 최근에 북한이 개성 단지를 군기지로 만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서울이 50킬로미터 안으로 들어와 북한의 제일 초소라고 전했다. 최전방 화력 기지로 완전히 탈 바꾸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대한민국이 만들어준 건물, 아스팔트 길 등등으로 그들이 탱크와 무기를 가지고 진격할 것이란 보도이다. 이제 북한도 마치 다니엘서에 벨사살 왕처럼 저울에 달린 격이 되어 버렸다. 아모스서 1장과 2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는 물론이고 그 주위에 있는 나라들에 대한 심판이 설명돼 있다. 제아무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나라들이라도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하는 나라는 분명히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어찌 사람을 철 타작기로 타작하였는가! 생명의 존엄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은 이런 일을 자행하는 패역한 나라들을 가만히 두고 보시지는 않으신다. 이제 우리는 종말을 살고 있고, 그때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임박했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이 마지막 때 어떻게 해야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에 대한 질문을 안 해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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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내려놓을 때 하나님이 시작하신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인생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분명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도 드리는데 마음 한구석이 계속 눌려 있다. 해야 할 일보다 마음의 짐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많은 경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지나간 상처, 이미 끝난 관계, 내려오지 않는 자존심, 더 가지려는 욕심, 잃어버릴까 두려운 미래, 내 뜻대로 돼야 한다는 고집, 손에 꼭 쥐고 있을수록 마음은 더 무거워지고 삶은 점점 지쳐 간다.신앙은 더 많이 붙드는 기술이 아니라 더 깊이 맡기는 믿음이다. 세상은 붙잡아야 안전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맡길 때 비로소 참된 평안이 시작된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중요한 순간에 붙드는 손을 펴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결정적인 순간에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고향과 익숙한 삶을 내려놓았다. 더 나아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까지 제단 위에 올려놓았다. 인간적으로는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아브라함은 붙잡지 않고 하나님께 맡겼다.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숫양을 준비하셨고, 믿음의 조상이 되는 축복의 역사를 시작하셨다.사르밧 과부도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줌의 밀가루와 조금의 기름뿐이었다. 그것은 오늘을 버티게 할 마지막 희망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녀는 그것마저 내려놓았다. 마지막 식사가 될 수 있는 떡을 먼저 엘리야에게 드렸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가장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 내려놓음 위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됐다.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제나 믿음으로 내려놓는 자의 빈손을 은혜로 채우신다.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익숙했던 배와 그물을 내려놓았다. 그것은 단순한 직업의 포기가 아니었다. 자신의 미래와 생계, 익숙함과 안전함을 주님께 맡기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그 순간 평범한 어부는 사람을 낚는 사도가 됐으며, 한 번의 설교로 삼천 명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됐다. 바울 역시 내려놓음의 사람이다. 그는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좋은 가문, 최고의 학문, 종교적 열심, 사회적 명예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배설물로 여긴다.” 바울은 자랑스럽게 여겼던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 순간 하나님은 바울을 복음의 가장 위대한 통로로 사용하셨다.왜 우리는 내려놓지 못할까. 대개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두려움이다. 내려놓으면 잃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존심이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이다. 셋째는 욕심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마음이 손을 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믿음은 역설이다. 붙잡으면 오히려 무거워지고, 맡기면 비로소 자유로워진다.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은 신앙의 본질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생각, 자기 방식, 자기 뜻, 자기 기준을 절대화하는 삶을 멈추는 것이다. 신앙은 내 뜻을 하나님께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내 삶을 맞추는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그 길을 몸소 보여주셨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믿음의 가장 깊은 자리다. 자기 뜻을 내려놓는 순간 하나님의 뜻이 시작된다. 또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욕심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심, 더 소유하고 싶은 욕심, 더 성공하고 싶은 욕심은 결국 우리 영혼을 무겁게 만든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단순히 고난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내 욕망이 죽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심이 죽을 때 비로소 믿음이 살아난다.마지막으로 내려놓아야 할 것은 인생의 주인 자리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삶의 결정권은 자신이 쥐고 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조력자가 아니라 주인으로 모시는 삶이다. 내가 인생의 주인일 때는 모든 것이 짐이 된다. 미래도, 관계도, 사역도, 가정도 결국 내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 주권을 맡기는 순간 마음은 달라진다. 두려움 대신 평안이 찾아오고, 무거움 대신 자유가 시작된다.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 전에 내려놓음의 상징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고,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으셨고, 마침내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리고 바로 그 내려놓음 위에서 인류의 구원이 시작됐다.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내려놓음 위에서 시작됐다. 오늘 우리 삶이 힘든 이유는 일이 많아서만이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상처를 붙잡고, 걱정을 붙잡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자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붙잡으면 짐이 되지만, 하나님께 맡기면 기적이 된다. 붙드는 손을 펴는 순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신다. 내려놓을 때 은혜가 시작되고, 내려놓을 때 능력이 나타나고, 내려놓을 때 새로운 역사가 열린다.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조용히 손을 편다. 자존심과 욕심·상처·두려움을 내려놓고, 인생의 주인 자리까지 내려놓는다. 내려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다시 시작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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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77
    [오피니언] The letter 24 김광근 - 아침에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 시편 5편 3절하루는 무엇으로 시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방향으 로 흘러갑니다 많은 사람들은 눈을 뜨자마자 정보와 격정 속으로 들어가지만,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3).이 고백은 단순한 경건 습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표현이며 아침에 하나님을 찾는다는것은 "나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라는 신앙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남는 시간에 찾는 분이 아니라, 가장 먼저 바라보아야 할 분입니다. 또한 다윗은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막연한 독백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의 행위입니다. 이확신이 없으면 기도는 쉽게 형식으로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도 들으신다는 믿음은 우리의 기도를 지속하게 만듭니다.그리고 그는 "바라리이다"라고 덧붙입니다. 이는 기도가 단지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응답과 일하심을 기대하며 사는 삶으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기도한 사람은 하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찾으며 살아가야 합니다.결국 핵심은 시선입니다. 문제를 먼저 보면 두려움이 커지고, 자신을 보면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은 상황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아침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방향입니다. 오늘도 이 고백으로 하루를 열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을 항해 퍼져나갑니다. 오늘하루, 내가 아끼는 작은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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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변함없은 은혜를 기대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6.04.21
    1 오늘도 새날을 주시고 새로 시작되는 첫 시간에 변함없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며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입니다.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가슴 뭉클한 감사가 나옵니다.3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듯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형제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오늘도 가까운 식구들을 서로 사랑하는 일을 우선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4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으로 털어놓는 기막힌 사모님의 사연을 듣는 중에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 주시니 더 간절히 중보기도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5 부활 후에 주고 가신 선물들을 매 순간 성경 속에서 찾아내다 보니 한없이 나옵니다. 그동안 움켜쥐고 있던 주먹을 놓게 하시더니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새들이 날개를 펴고 날듯이 창공을 날 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보고 미소 짓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6 사모들의 간증을 들을 때마다 속에 감춰진 가능성과 은사를 찾기 위해 안테나를 높이 세워서 경청에 최선을 다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7 오랜동안 사역해 오다 보니 순수성을 잃어가고 나의 경험과 터득된 지식들이 앞장서서 사랑에 수많은 잡티들이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자 십자가 앞에 나아가 처음 사랑의 순수성을 다시 찾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8 우리는 사랑한다 해도 조건을 붙일 때가 많습니다. 옳고 그름이 앞서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조건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면서 하는 사랑이므로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 속에서나 이 사랑이 닿는 곳이라면 생명이 살아나게 되어 있으니 이 사랑을 다시 하기로 재 다짐하며 감사합니다.9 이번 달 실천 사항은 1) 다시 복음으로, 2) 다시 처음 사랑으로, 3) 다시 내 자리로 입니다 "다시"라는 희망언어는 매우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 “다시”가 없었다면? 내 생애 속에서도 “다시”가 없다면? 십자가에서 “다시”부활이 없다면? 을 묵상할 때마다 새로운 비전이 밀려와 “다시”감사를 드립니다.10 하나님이 정해주신 정체성을 소홀히 하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복 탄력성을 주셔서 사모들의 정체성을 다시 찾아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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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척하는 인생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Netflix에서 흥행했던 요리 프로그램 흑백 요리사 시즌2 가 성황리에 끝났다. 결승에서 우승한 최강록 셰프는 마지막 대회의 과제인, ‘나를 위한 요리’ 를 만드는 경합에서 그가 선택한 요리에 대한 이유와 고백이 많은 이들을 공감하게 했다. 대회 내내 자신의 무기처럼 사용한 조림기술. 모두가 또 한 번 이 비장의 기술로 최고의 조림요리를 만들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그는 다른 요리를 선택했다. 이유는 뜻밖에도 자신이 조림요리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잘 하는 척을 할 뿐이라고 했다. 본인을 위해 하는 요리는 진심이어야 하는데, 스스로에게 잘하는 척하는 요리를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척하면서 살 때가 많은데, 이 순간만은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는 말이었다. 아무리 주위에서 인정한다 해도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요리를 마치 가장 잘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잘 못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자. 이 순간만큼은 척하는 모습에서 자유로워지자는 뜻이었다. 이 말은 들은 많은 경연대회 참가자들이 공감했다. 심사위원인 미쉴렝 쓰리스타 안성재 셰프도 최강록 셰프의 말에 공감하며 자신도 잘하는 척을 한다고 말했다. 사실 우리 모두 척하면서 산다. 그래야 주위에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고 존중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잘하는 사람으로 소개해야 기회가 생길 것 같다. 우리의 이력서를 보아도 그렇고, 소셜 미디어에 올리는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바쁜 사람인 것처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래서 척하며 산다는 말이 공감이 간다. 우리모두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의미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보여주며 살기 어렵다. 부족한 내 모습을 받아 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몇 안 된다. 심지어 그 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도 나의 허물을 보이기 싫어한다. 그래서 잘난 척, 아는 척, 괜찮은 척, 아무 일도 없는 척하며 산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약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척하며 산다. 그렇게 우리모두 자신을 포장하며 산다. 어쩌면 이 땅에 사는 동안 계속해서 척하며 살게 될지 모른다.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부족한 면이 있을 것이다.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것들이 있으니 그것을 다 공개하며 살 수는 없다. 그것은 서로를 힘들게 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인 교회안에서도 우리의 허물을 다 공개하면서 살기 어렵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부부사이에도 보여주기 싫은 모습들이 있다. 결국 내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 주고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 밖에 없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척할 필요가 없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만은 아무것도 감출 게 없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 앞에 그 어떤 포장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유일하게 척할 필요 없이 나아갈 수 있는 분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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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에드워즈 연구, 무엇을 비추고 무엇을 놓쳤는가?>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한 인물에 대한 연구는 단순한 지식의 축적을 넘어, 우리가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 1758)에 대한 방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그를 충분히 연구해 왔는가, 아니면 어떤 중요한 측면을 여전히 놓치고 있는가? 에드워즈에 대한 연구는 지난 수 세기 동안 꾸준히 축적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연구의 흐름을 면밀히 살펴보면 분명한 특징이 드러난다. 우리는 많은 것을 밝혀 왔지만, 동시에 중요한 부분을 충분히 조명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에드워즈 연구는 이미 방대한 규모에 이르렀다. 노스이스턴대학교의 M. X. 레서(M. X. Lesser)가 정리한 문헌 목록에 따르면, 1729 년부터 2005 년까지 3,000 편이 넘는 연구가 출판되었다. 특히 20 세기 후반 이후 연구는 더욱 활발해지며, 에드워즈는 신학을 넘어 철학, 문학, 윤리학, 미국 지성사 등 다양한 학문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탐구되는 인물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이 특정 시대의 종교적 현상에 머물지 않고, 인간과 신앙, 세계를 이해하는 깊은 사유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연구 동향에서도 분명히 확인된다. ProQuest 데이터에 따르면, 2000 년부터 2020 년까지 에드워즈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은 총 2,551 편에 이르며, 그중 57.5%인 1,467 편이 최근 10 년(2011–2020)에 집중되어 발표되었다. 이는 에드워즈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오늘날까지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지표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의 확장 속에서도 분명한 한계가 드러난다. 같은 기간 선교학 분야에서 발표된 에드워즈 관련 논문은 단 37 편, 전체의 약 1.45%에 불과하다. 최근 10 년간 발표된 논문 역시 28 편에 그쳐, 그의 사상이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는 것에 비해 선교학적 반영은 여전히 제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처럼 방대한 연구의 축적은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준다. 에드워즈는 특정 신학 전통에만 속한 인물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학자들에게도 지속적으로 연구되어 온 보편적 사상가라는 점이다. 하버드의 역사학자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그의 신학에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에드워즈를 미국 지성사의 핵심 인물로 재조명하였다. 복음주의 전통 안에서도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파이퍼(John Piper) 등을 통해 그의 신학은 계속해서 새롭게 해석되고 확산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흐름 속에서 분명한 공백 하나가 드러난다. 그것은 바로 선교학적 관점이다. 통계적으로 보더라도 에드워즈 연구는 주로 신학, 철학, 부흥 운동, 설교학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의 선교사적 정체성과 사역은 상대적으로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 많은 연구가 그의 사상을 깊이 탐구했지만, 그의 삶의 자리에서 구현된 선교적 실천은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사실 에드워즈는 단순한 신학자나 설교자가 아니었다. 그는 생애 마지막 7 년을 스톡브리지(Stockbridge)에서 인디언 공동체와 함께하며 선교사로 살았다. 그는 그들과 삶을 나누고,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며, 복음을 삶으로 증언했다. 그의 신학은 강단 위에서만 선포된 것이 아니라, 선교 현장에서 살아낸 신앙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에드워즈를 설교자나 사상가로만 이해할 때, 그의 신학은 추상적인 체계로 남게 된다. 그러나 선교사로서의 삶을 함께 볼 때, 그의 신학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구현된 살아 있는 신앙으로 드러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에드워즈 연구는 새로운 방향을 요구받는다. 이 흐름은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낯선 문화 속에서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이미 많은 신학적 지식과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삶과 선교적 정체성으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에드워즈 연구의 흐름은 분명 많은 것을 비추어 왔다. 그의 신학과 사상, 영성과 부흥에 대한 깊은 통찰은 오늘의 교회에도 귀중한 유산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이 풍성한 연구 속에서 과연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가? 그 놓쳐진 영역은 바로 선교적 시선이다. 에드워즈는 사상가이기 이전에, 복음을 들고 낯선 공동체 한가운데로 들어갔던 선교사였다. 그의 신학은 책 속에 머무는 사유가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구현된 신앙이었다. 따라서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해석을 넘어, 선교적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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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여주봉 칼럼 -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사명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선교적 교회의 핵심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은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은 인간의 영혼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각 개인의 모든 영역, 인간 사회와 역사의 모든 영역, 더 나아가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포함한다. 골로새서 1장 15~23에서 바울이 선포하듯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시는 이 구속은 우주적이다. 예수의 부활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온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선교도 이 구속의 폭만큼 넓어야 하며, 문화명령과 대위임령의 통합이 필요하다.이 거대한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가 바로 교회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 이후 모든 창조세계를 구속하시기로 결정하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 일을 시작하셨다.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백성은 교회로 이어졌고,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온 세상에 하나님의 구속을 나타내 보이시고 전하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단순히 구원받은 개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창조를 이뤄가시는 역사의 동역자다.그렇다면 교회가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그것은 먼저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doing)은 교회의 삶(being)에서 나온다. 교회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데서 나온다. 마이클 고힌 박사가 말하듯이, "'선교적'이란 교회의 구체적인 활동이 아니라, 교회가 문화적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 속에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모습으로서 교회의 본질과 정체성을 서술하는 것이다"('열방에 빛을', 42-43쪽).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을 성경은 '산 위의 도시'로 묘사한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속이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대안 공동체다. 정의와 공의, 사랑과 긍휼, 화해와 평화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하나님의 새 창조의 역사가 구현되는 모습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공동체.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불렀을 때부터 의도하신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고, 오늘날 교회에게 주어진 모습이다.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모습이 되지 못하면, 아무리 열심히 전도하고 사회에 참여해도 세상은 하나님의 구속의 실재를 보지 못한다. 복음의 포괄적 성격을 아무리 잘 이해하고, 문화명령과 대위임령의 통합을 아무리 잘 설명해도, 그것이 교회의 삶으로 구현되지 않으면 한낱 이론에 그치고 만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르완다는 기독교 인구가 넘쳐났지만 그 믿음이 요청하는 정체성과 사명이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반면에, 초대교회는 작고 연약했지만 그 존재 자체가 주변 세계에 강력한 증거가 됐다. 그들의 삶이 곧 복음이었고, 그들의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표현이었다. 사도행전이 증거하듯이 초대교회는 가르침과 교제와 떡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며(행 2:42), 서로 나누는 삶을 살았고(행 2:44~45),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으며(행 2:47),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 2:47).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공동체가 됐을 때, 그 존재 자체가 복음의 선포가 되었고, 그 삶 자체가 하나님의 구속의 증거가 된 것이다. 결국 교회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은 단순히 이상적인 목표가 아니라 선교적 삶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교회의 선교적 정체성과 사명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그 교회는 하나님의 구속을 어떤 원리로 이뤄가는가?구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태초부터 열방에 복이 되기 위해 복을 받은 존재였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임재를 매개하는 공동체다. 레위기 19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선택은 윤리적 삶으로 나타나고, 그 윤리적 삶이 곧 선교적 증거가 된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라고 하신 명령 뒤에 이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규범들 즉 이웃 사랑, 약자 보호, 공정한 재판, 정직한 상거래 등은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신명기 4장에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규례와 법도를 너희에게 가르쳤나니…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 4:5~6). 열방이 하나님의 백성을 보고 그 지혜와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산 위의 도시'로서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의도다.신약으로 넘어오면, 교회는 이 구약 백성의 정체성과 역할을 이어받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결정적 사건 이후에 새로운 특징을 갖게 된다.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그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선교적 백성이다. 교회는 입술의 선포뿐 아니라, 삶과 행동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드러낸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시작된 새 창조에 동참하는 새로운 인류로서, 옛 세상의 질서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구현한다. 또한 교회는 성령의 전으로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 모든 사명을 감당한다. 이 모든 정체성의 중심에 예배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본질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이며, 이 예배가 선교적 삶의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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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3 김광근 - 주님의 발치에 부어드리는 향기로운 희생 크리스천헤럴드2026.03.31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마가복음 14장 6절전 재산과 다름없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어찌하여 허비하느냐"며 분노했지만 주님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세상 눈에는 무의미한 낭비처럼 보일지라도, 주님은 당신의 장례를 준비하는 가장 아름다운 행위로 받으신 것입니다.우리는 주님을 섬기며 때때로 '시간과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기도 합니다. 당장 열매가 보이지 않아 헛된 수고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과연 순수한 마음으로 최선의 것을 드리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소중한 향유가 주님께 부어질 수 있도록 스스로 옥합을 깬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라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희생인 것입니다.성전을 밝히는 등잔의 기름이 늘 타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과 열정도 멈추지 않고 타올라야 합니다 우리 역시 가장 소중한 것을 주님의 발치에 쏟아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리아의 옥합이 깨질 때 그 집에 향기가 가득했듯이, 우리가 주님을 위해 자신을 깨뜨릴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을 항해 퍼져나갑니다. 오늘하루, 내가 아끼는 작은 옥합을 깨뜨려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리지 않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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