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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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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상처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당신들은 나클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윤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 창세기 50장 20절인생의 울타리가 사라졌다고 느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먼저 고개 드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야곱이 죽자 요셉의 형들은 오래전 자신들이 저지른 죄가 마침내 보복으로 돌아올까 멸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 앞에서 심판자의 자리에 않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한마디는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용서는 악을 가볍게 여기는 일이 아닙니다. 내 존으로 끝까지 같아 주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공의와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사람의 악한 계획보다 하나님의 선한 섭리가 더 깊고 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용서는 말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과 그 자녀를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간곡히 위로했습니다이은혜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죽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통해 우리를 살리는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의 최종 결정권은 나를 아프게 한 사람이나 환경에 있지 않습니다. 보본이지 않아도 통치하시고. 늦어 보여도 선으로 빛으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과 분노를 십자가 않에 내려놓읍시다 주님은 상처를 별로, 눈물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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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크리스천헤럴드2026.07.14
    1 오늘은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입니다. 자유가 없는 나라에서나 전쟁의 위협 속에서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이웃들을 생각하며 감사를 드립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눅15:29)입니다. 이런 아들의 불평을 달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3 큰 아들은 아버지집에서 살았지만 자녀로 살지 않고 종으로 살았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께 보상을 바라며 동생을 정죄하고 비판과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런 아들에게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설득하시고 타일러 주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4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감동을 받으면 은혜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설교가 마음에 부담이 되거나 죄를 지적당하면 시험에 들기까지 합니다. 치리와 징계가 사라지고 있는 현대 교회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하며 감사를 드립니다.5 하나님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데 우리는 자녀의 특권을 실제로 얼마나 누리며 사는지 돌아볼 때마다 아버지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어제보다 오늘 조금씩 더 알아가기를 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6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약속하신 것을 매우 소중히 여겨 태어나서도 장자의 명분을 매우 소중히 여겼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는 것을 무엇보다 우선시 한 야곱의 생애를 묵상하며 나에게도 약속한 말씀 붙잡고 나 아갈 것을 다짐 하며 감사드립니다.7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목적은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 된 것처럼 우리 인간도 아버지와 하나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죽으신 은혜를 생각할수록 감히 하나님과 하나 됨의 축복을 어찌 다 실감할 수 있으리오? 기쁨이 넘칠 수 있게 하심이 감사합니다.8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간판아래 나의 욕망을 채우기 쉽습니다. 나의 소원이 다 이루어졌다고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들은 이것을 알았기에 자신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요, 우리는 구원 얻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9 어떤 사역 중에도 가장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영혼구원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만이 경험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우선순위로 하고 복음 전파에 가장 큰 무게를 두고 사역에 임할 것을 다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10 해외 여러 나라로 부름 받아 복음 위해 나아간 사모님들을 섬길 때마다 각 나라 언어로 문회에 적응하느라 애를 쓰는 노고를 주님이 아시고 더 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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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역사 의식에서 시작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5월 18일, 한국의 스타벅스코리아가 텀블러 판촉 행사에 ‘탱크데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거센 비판을 받았다. 홍보 문구에는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함께 쓰였다. 문제는 그날이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이었다는 사실이다. 논란이 커지자 스타벅스는 행사를 중단하고 사과했다. 대표이사 명의의 사과문에서는 5·18 영령과 오월 단체, 광주 시민, 박종철 열사 유가족에게 사죄했고, 임직원 역사 교육과 내부 검수 절차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누군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상품 이름이 우연히 그렇게 정해진 것 아니냐고. 텀블러의 모양이나 행사 콘셉트 때문에 ‘탱크’라는 말을 쓴 것뿐 아니냐고. ‘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그저 가벼운 광고 문구 아니었겠느냐고. 물론 의도적으로 역사를 조롱하려 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번 논란은 단순한 홍보 실수로만 넘기기 어렵다. 날짜와 단어와 역사적 기억이 한꺼번에 겹쳤기 때문이다.왜냐하면 5월 18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아무 날짜가 아니다. 1980년 광주에서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 앞에 섰고, 탱크와 장갑차는 그 비극의 기억 속에 깊이 남아 있다. 그러니 그날 ‘탱크데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누군가에게 그것은 이벤트 이름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어떤 이에게는 군홧발 소리로, 어떤 이에게는 금남로의 공포로, 또 어떤 이에게는 아직 다 아물지 않은 광주의 상처로 들렸을 것이다.‘책상에 탁!’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권력은 한 청년의 죽음을 숨기려 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말은 국가폭력의 거짓말로 한국 사회에 남아 있다. 그래서 ‘탁’이라는 한 글자는 어떤 이에게 경쾌한 의성어가 아니다. 그것은 고통을 지우려 했던 말, 죽음을 가볍게 덮으려 했던 말, 폭력의 책임을 회피하려 했던 말로 기억될 수 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이 의도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 의식은 단순히 연도를 외우는 일이 아니다. 1980년 5월 18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것, 1987년 박종철 열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역사 의식은 그 사건들이 오늘의 언어와 상징 속에서 어떻게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감각이다. 이 날짜에는 어떤 말을 조심해야 하는지, 이 표현은 누구의 상처를 건드릴 수 있는지, 이 상징은 어떤 기억을 불러낼 수 있는지를 묻는 태도다.기업 마케팅은 늘 빠르다. 더 짧아야 하고, 더 눈에 띄어야 하고, 더 자극적이어야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을 멈추게 해야 하고, 클릭하게 해야 하고, 구매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그 속도 속에서 자주 사라지는 것이 있다. 맥락이다. “이 말이 팔릴까”는 묻지만, “이 말이 누구를 아프게 할까”는 묻지 않는다. “재미있나”는 보지만, “역사 앞에서 괜찮은가”는 묻지 못한다.이번 사건은 바로 그 빈틈에서 일어났다. 한 기업의 홍보 문구가 한 도시의 슬픔을 건드렸고, 짧은 이벤트 이름이 민주화의 상처를 다시 불러냈다. 이것은 단순히 한 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기억을 얼마나 쉽게 소비하고, 언어를 얼마나 가볍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소통은 말을 빠르게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다. 소통은 말하기 전에 그 말이 닿을 사람의 기억을 생각하는 책임이다. 그러므로 이번 스타벅스 논란은 한 기업의 실수로만 끝낼 일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역사적 기억을 얼마나 쉽게 지나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다. 여기서 교회의 질문이 시작된다.교회는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공동체인가. 우리는 상처 입은 사람들의 기억을 충분히 듣고 있는가. 아니면 너무 쉽게 “이제는 잊자”, “그만 넘어가자”, “너무 예민하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기독교 신앙은 본래 기억의 신앙이다. 성찬은 “나를 기념하라”는 주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 출애굽의 신앙도 기억 위에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애굽에서 종 되었던 시간을 잊지 말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고통의 기억을 잃어버린 공동체는 쉽게 강자의 언어를 쓰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팠던 시간을 잊은 사람은 남의 아픔에도 둔감해진다.그래서 교회가 역사적 상처 앞에서 가져야 할 첫 태도는 해석이 아니라 경청이다. 역사의 아픔 앞에서 교회는 함부로 말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자리는 설명보다 침묵이 먼저다. 어떤 상처 앞에서는 정답보다 애도가 먼저다. 신발을 벗고 서야 하는 거룩한 땅처럼,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 앞에서는 우리의 언어도 낮아져야 한다.소통하는 교회는 세상보다 말을 많이 하는 교회가 아니다. 사람들의 아픔을 더 깊이 듣는 교회다. 왜 사람들이 분노했는지, 왜 단어 하나가 마음을 무너뜨렸는지, 왜 “실수였다”는 해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 들음이 없으면 교회의 말은 복음처럼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또 하나의 판단처럼 들릴 수 있다.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다.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이것은 단순히 따뜻한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약한 것을 더 약하게 만들지 않는 말, 상처 난 곳을 다시 찌르지 않는 태도, 기억을 함부로 소비하지 않는 조심스러움. 그것이 복음의 언어다.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려면 말을 다시 배워야 한다. 더 멋진 말이 아니라 더 조심스러운 말. 더 강한 말이 아니라 더 낮은 말. 더 빠른 말이 아니라 더 오래 듣고 난 뒤에 나오는 말. 그리고 역사 앞에서 말을 조심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소통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교회는 세상의 상처를 비껴가는 공동체가 아니라, 그 상처 곁에 조용히 머무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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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가슴으로 들어야 할 말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지날 때였다. 마음이 힘드니 신앙적으로도 약해졌다. 기도가 잘 되지 않았고 말씀을 읽어도 큰 위로를 받지 못했다. 이미 여러 번 읽었던 잘 알고 있는 말씀인데 다시 읽는다고 해서 특별히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렇게 가슴은 점점 메말라 갔다. 그래도 붙을 것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힘들게 새벽에 일어나 예배당에 가서 무릎을 끓고 기도를 했지만 평안을 얻지 못했다. 나를 위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은 냉랭했다. 그렇게 하나님은 점점 더 멀게만 느껴졌다. 그 무렵 타주에서 목회하는 선배가 잠시 우리집에 방문했다. 며칠을 같이 지내게 되었는데 내가 작정 새벽기도를 할 때라서 선배에게 같이 새벽기도를 가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이런 나의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새벽에 같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 왠지 위로가 될 것 같았다. 시차도 있고 멀리서 와서 고단해 다음날 새벽기도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부탁하니 그러기로 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서는데 선배가 “와...” 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다. 선배가 나를 위해 기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갑자기 눈물이 나며 마치 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준비하신 것처럼 성령님께서 가슴을 뜨겁게 하시며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깜짝 놀랬다며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 주었다.  이 말을 듣고 콧등이 찡해지며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선배에게 물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데? 정말 그렇게 나를 사랑한다고 하셨어?” 믿기 어려운 듯 되물었다. 그제서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확신하며 가슴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로서 마음속 깊은 곳에 평안을 얻고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데 혼자인 것처럼 외로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하나님이 언제나 변함없이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성경을 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말씀이고, 성경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하나님의 진심이다. 설교를 통해, 큐 티를 통해 날마다 듣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으로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언제부터 인가 사랑하는 말을 머리로만 듣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거리가 생기자 마음이 약해지고 신앙을 행위에만 의존하게 된 것이다. 행위가 마음을 대신하면서 사랑한다는 그 말을 가슴으로 듣지 않고 머리로만 듣게 된 것이다.나와 세상 끝까지 함께 하시고, 죽도록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도 있음에도 가슴이 식어버린 이유는 이 사실을 몰라서도, 충분히 듣지 못해서도 아니라 지식으로만 남았기 때문이다. 얼만큼 들었냐가 아니라 어디로 들었냐가 관건이다. 듣고 또 들어도 가슴에 울림 없이 머릿속 지식으로만 쌓여 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관계속에서도 경험한다. 어떤 일로 인해 사이가 서원해지만 심정에 변화가 생겨 멀어질 때가 있다. 그러다 보면 서로의 마음을 잘 몰라주게 된다. 서로를 대한 마음은 변한 것이 없고,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니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머리로는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으로 느끼지 못해 생기는 현상이다. 가슴으로 들어야 할 말을 머리로만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나를 사랑한다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가슴으로 들어야 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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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다음 세대를 세우는 선교신학 에드워즈의 교육관과 디아스포… 크리스천헤럴드2026.07.03
    요즘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넷플릭스 드라마 ‘참교육’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 공개 하루 만에 넷플릭스 코리아 1 위를 기록한 이 드라마는 무너진 교육 현장과 교권 붕괴라는 묵직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며 한국은 물론 해외 한인 사회에서도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통쾌하다는 반응과 씁쓸하다는 반응이 동시에 나오는 이유는 하나다. 드라마가 건드린 질문이 현실의 질문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과연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있는가.” 이 질문은 미주 한인 부모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장소가 달라졌을 뿐, 자녀 교육을 둘러싼 고민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성공적인 삶을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부모라면 곧 또 다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 아이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이 두 질문 사이에서 많은 디아스포라 가정이 갈등한다. 미국 사회의 기준과 신앙 공동체의 기대, 부모의 소망과 자녀의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쪽을 붙잡아야 할지 흔들린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는 18 세기 사람이지만, 그의 교육관은 바로 이 갈등 앞에 서 있는 오늘의 디아스포라 부모들에게 놀랍도록 선명한 방향을 제시한다. 에드워즈는 교육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사회적 성공을 위한 준비로 보지 않았다. 그에게 교육이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는 과정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참된 교육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방향을 바로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고 그는 믿었다. 이것은 에드워즈의 신학에서 ‘종교적 정서(Religious AffecFons)’와 깊이 연결된다. 그는 참된 신앙이 머리의 동의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성경 지식을 외우게 하고 교회 출석을 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녀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기울어지도록, 그분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맛보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 교육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에드워즈의 가정은 그 자체로 하나의 교육 현장이었다. 그는 자녀들과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훈련을 했다.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매일 저녁 가족과 함께 경건의 시간을 가졌으며, 자녀 한 명 한 명의 영적 상태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아내 사라(Sarah Edwards) 역시 이 교육의 동반자였다. 가정은 교회와 분리된 공간이 아니라, 신앙이 살아 숨 쉬는 첫 번째 선교지였다. 스톡브리지 인디언 사역에서도 에드워즈의 교육 철학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인디언 아이들에게 단순히 영어와 읽기를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이해와 대화를 통해 복음을 내면화하도록 돕는 교육을 실천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겨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 미주 한인 2 세 교육에도 직접적인 통찰을 준다. 우리 자녀들은 두 언어, 두 문화 사이에 서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방향은 문화와 언어를 초월한다. 에드워즈는 또한 교육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자녀가 의사가 되든, 교사가 되든, 사업가가 되든 그 직업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소명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종교개혁의 소명론(召命論, VocaFon)을 에드워즈가 교육 현장에서 구체화한 것이었다. 자녀의 미래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좋은 직장’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소명’을 붙들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디아스포라 2 세의 이중 정체성은 약점이 아니라 소명이 될 수 있다. 한국의 언어와 정서, 미국의 사고방식과 글로벌 감각을 동시에 품은 2 세는 어느 한 문화에만 속한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명을 위해 준비된 존재일 수 있다. 에드워즈가 경계선의 사람 브레이너드를 통해 인디언 선교의 문을 열었듯, 하나님은 경계선 위에 선 2 세들을 통해 이 시대의 선교를 열어 가실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자녀에게 부담을 지우는 이야기가 아니다. 에드워즈의 교육관에서 핵심은 강요가 아니라 환경이었다. 부모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낼 때, 자녀는 그 삶을 보고 자란다. 설교보다 삶이 먼저였다. 논리보다 경험이 먼저였다. 에드워즈 자신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매료된 사람이었고, 그 매력이 자녀들에게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갔다. 부모의 신앙이 곧 자녀의 첫 번째 교과서였다.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부모들에게 이 메시지는 깊은 위로이자 도전이다. 우리는 자녀에게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이 땅에 왔다. 그 마음은 귀하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묻는다. 우리가 자녀에게 주고자 하는 가장 귀한 유산은 무엇인가. 학벌인가, 재산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의미 있다는 확신인가.  에드워즈의 11 명의 자녀들 중 많은 이들이 신학자, 목회자, 사회 지도자로 자랐다. 이것은 유전이나 환경만의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 가정의 분위기, 지성과 신앙을 함께 추구하는 삶의 태도, 그리고 무엇보다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의 헌신이 만들어 낸 열매였다. 한 가정의 신앙적 깊이는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의 역사를 형성한다. 결국 다음 세대를 세우는 것은 프로그램이나 커리큘럼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부모의 삶이, 자녀에게 전해지는 가장 강력한 선교신학이다. 에드워즈는 그것을 자신의 가정과 스톡브리지 교육 현장에서 몸소 증명했다. 선교는 먼 곳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 가정 안에서, 자녀와의 저녁 식탁에서, 잠들기 전 나누는 기도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 그것 자체가 선교이다.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때, 에드워즈가 꿈꾸었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느린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강력한 선교의 방식일 수 있다. 우리는 자녀에게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 사람을 세상에 보낸다. 그리고 그 사람을 세우는 첫 번째 자리는 교회도 학교도 아닌, 바로 우리의 가정이다. 에드워즈의 교육관은 오늘 우리에게 말한다. 다음 세대를 세우는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그 작고 일상적인 헌신 안에 하나님 나라의 씨앗이 담겨 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도는 세대를 건너 열매를 맺는다. 가정은 디아스포라 선교의 첫 번째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오늘도 하나님 나라는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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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26 김광근 -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 크리스천헤럴드2026.07.02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리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 민수기 14장 9절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넌 은혜의 백성이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매일 아침의 만나로 살아왔지만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들려온 정탐꾼들의 보고 앞에서 마음이 얼어붙었습니다 "성읍은 견고하고 백성은 장대하더라" 정확한 분석이었으나, 그 분석은 결국 밤새도록 통곡과 원망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절망으로 이어졌습니다.하지만, 같은 광경을 보고도 다른 고백을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그들도 아낙 자손의 거대함을 똑같이 보았지만. 환경보다 크신 하나님의 약속을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선포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개역한글) 자신을 메뚜기로 여겼던 백성과는 정반대의 고백이었습니다 문제가 커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의 임재를 보지 못해서 두려운 것임을 그들은 알았습니다오늘 우리 눈에 더 크게 보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짓누르는 현실입니까, 아니면 그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까? 기도의 무릎을 끓을 때,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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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가정의 달, 5월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1 오늘은 가정의 달 절반이 지나가는 날입니다. 매일같이 가정을 점검하다 보니 갈수록 깊은 상처들이 보여서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보며 감사를 드립니다.2 오늘 주신 말씀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을 수 있도록 은혜주심에 감사합니다.3 영적 고수들은 바보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해를 기꺼이 감수합니다.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줄 압니다. 세상은 의외로 이런 분들을 존경하며 머리를 숙이게 되는데 가치기준이 다르기 때문이기에 감사합니다.4 나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 영적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가는 영적 고수들은 악의 세력 앞에서도 넉넉히 받아낼 수 있는 사랑의 화살이 있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5 가정이란 용서를 연습하는 실습장이요 연합을 연습하고 감사도 연습하는 장소입니다. 아직 미완성의 인격체들의 모임이기에 실수가 용납되고 또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장소이기에 가정을 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6 인간관계에는 가르쳐 주어도 모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특별히 가르쳐 주지 않아도 배워지는 관계가 있으니 이런 관계는 하나님이 특별히 주신 관계의 축복임을 재확인하고 이런 분들이 나의 멘토가 되어주심 감사합니다.7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시 37:8에 말씀하시는 이유는 불평은 악을 만들어내는 재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모든 불평을 몰아내고 그 빈자리에 감사와 희망을 심기로 결단하며 감사를 드립니다.8 내게 사랑을 요구하는 자들이 날로 갈수록 많아집니다. 때로는 밑천이 동이 나서 더 이상 나누어 줄 사랑이 없을 때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그때 평소에 저축해 놓은 영적 저금통장을 털어 그것으로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이니 날마다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저금하여 두기로 작정하고 감사를 드립니다.9 사람의 욕망에는 인정의 욕구가 있습니다. 이 욕구가 결핍되면 불안과 초조 및 열등의식이 생깁니다. 주님을 만난 삭개오를 변화시키신 주님의 음성이 사모님들의 귀에도 들려지기를 바라며 감사를 드립니다.10 사람들의 자극으로 감정이 흔들릴 때마다 말씀을 무기로 삼고 사단의 방해를 보기 좋게 무찌를 수 있는 담력과 말씀의 칼을 잘 사용할 수 있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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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영훈 컬럼 - 도파민의 시대, 다시 골방의 영성으로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는 키워드 중에 하나가 바로 '도파밍'(Dofarming)과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이다. 여기서 '도파밍'이란 쾌락 호르몬인 '도파민'(Dopamine)과 수집한다는 뜻의 '파밍'(Farming)을 합성한 신조어로, 현대인들이 짧고 자극적인 재미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디지털 홍수 가운데 역설적으로 각종 전자기기 사용을 중단하고, 명상, 독서 등을 통해 몸과 마음을 회복시키려는 디지털 디톡스의 움직임 또한 커지고 있다. 일정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꺼낼 수 없게 하는 이른 바 '스마트폰 감옥'이라는 상품까지 등장해 큰 화제를 모았다.이러한 사회 현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명확하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사로잡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내면의 쉼과 회복을 갈망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현상을 넘어 자극에 지친 영혼이 평안과 안식을 원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그러나 참된 평안과 안식은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과 마주하는 시간 속에서만 누릴 수 있다.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등장한다. 바로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다.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하늘로부터 불이 내리는 엄청난 기적을 체험했지만, 곧바로 이어진 이세벨의 살해 위협 앞에 이내 탈진해 광야로 도망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친 엘리야를 광야에서 먹이시고 40일 길을 걸어 호렙산에 이르게 하셨다.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 불 가운데 계시지 않았던 하나님은 그 후에 오직 세미한 소리 가운데 그를 만나주셨다(왕상 19:12).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은 시끄러운 세상의 소음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다. 엘리야가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듯, 오늘날 우리도 세상의 소음을 차단하고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집중하는 영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세상의 디톡스가 잠시 마음을 비우는 명상에 머문다면, 그리스도인의 디톡스는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과 독대하는 나만의 골방을 마련하는 것이다. 매일 30분이라도 세상과의 연결을 끊어내고, 비워진 그 자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울 때 비로소 우리의 지친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엘리야를 회복시킨 것은 갈멜산의 불덩이가 아니라 호렙산의 세미한 음성이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자극적이고 화려한 세상의 소리에 무뎌진 우리의 영적 감각을 말씀과 기도로 다시 조율하고, 성령의 위로하심을 온전히 경험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평안과 새 힘을 얻게 된다.여기서 더 나아가, 골방의 영성으로 내면을 회복하고 새 힘을 얻은 성도는 이제 그 은혜를 삶의 실천으로 이어가야 한다. 참된 은혜는 우리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흘러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특히 가정의 달인 5월은 사랑 실천에 있어 중요한 방향성을 제시해 준다. 나의 유익과 만족에만 머물러 있던 시선을 들어, 내게 허락하신 가족과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을 향해 돌려야 한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그들의 눈을 직접 맞추고 따뜻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이다.어느덧 한 해의 절반을 향해 가고 있다. 올해 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굳게 세웠던 결심이 일상의 분주함과 세상의 자극 속에서 어느새 무뎌졌을지 모른다. 이제 하나님과 독대하는 나만의 골방으로 들어가는 거룩한 훈련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 선명하게 들려올 것이다. 이처럼 고요한 골방에서 얻은 새 힘으로 유혹 많은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사랑을 널리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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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이정기 칼럼 - 무너지는 시대, 가정을 지켜야 한다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매년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가정의 달인 5월에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장 아름다운 공동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가정이며, 그 중심에는 부부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고, 그 다음 중요한 관계가 부부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부부 관계도 건강해질 수 있다.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가정의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이혼율 증가, 저출산 문제, 혼인 기피, 독신주의 확산, 고독사 증가, 청소년 정서 불안, 세대 갈등까지 그 뿌리를 따라가 보면 결국 가정의 약화와 연결돼 있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함께 식사하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휴대폰 화면은 바라보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운 가족의 마음은 놓치고 살아가는 시대가 됐다.창세기를 보면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 서로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사랑 안에 거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하자 관계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과 멀어지자 부부 사이도 멀어졌다. 부부 문제의 깊은 뿌리에는 하나님과의 관계 문제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부부 관계가 힘들어질수록 먼저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세상에 완전한 부부는 없다. 모두가 연약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강하지 못한 부부는 상대를 바꾸려 하고 비난하려 한다. "당신은 왜 그러냐"는 말이 많아질수록 관계는 더 메말라 간다. 반면 건강한 부부는 상대의 허물보다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본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한다. "주님, 먼저 나를 변화시켜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은 그런 부부를 조금씩 아름답게 빚어 가신다.통계청 자료를 보면 혼인 건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으며, 결혼 자체를 두려워하거나 포기하는 청년들도 많아지고 있다. 경제적 부담과 가치관의 변화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깊은 곳에는 사랑과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가정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인간 사회의 가장 기초 단위이다. 가정이 건강하면 사회도 건강하고, 가정이 무너지면 사회도 흔들린다.특별히 오늘 시대는 관계를 쉽게 끊어 버리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차단하고, 힘들면 떠나고, 상처받기 전에 관계를 포기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랑을 끝까지 품고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한다. 부부는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끝까지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부부 관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는 말이다. 대부분의 갈등은 작은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말은 마음을 살리지만, 거친 말은 관계를 무너뜨린다. 특히 분노와 자극적인 언어에 익숙해진 시대 속에서 가정의 언어도 점점 거칠어지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라"(엡4:29)고 말씀한다.에베소서 5장은 부부 관계의 모델을 그리스도와 교회에서 찾는다. 아내에게는 "주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남편에게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억압과 지배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 주는 관계를 의미한다.아내는 남편을 존중하고 세워야 한다. 남자는 인정받을 때 힘을 얻는다. 작은 칭찬 한마디가 남편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를 목숨 바쳐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처럼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마음속에만 있으면 안 된다.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가 가정을 따뜻하게 만든다.성경은 부부를 한 몸이라고 말씀한다. 한 몸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함께 아파하고 함께 웃는 관계다. 서로의 약점을 들추기보다 덮어 주고, 정죄하기보다 품어 줄 때 가정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게 된다. 행복한 가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존중하는 말, 사랑의 표현,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함께 바라보는 믿음 위에 세워진다. 부부가 함께 기도하고 함께 예배할 때 하나님은 그 가정을 붙드신다.지금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는 가정의 회복이다.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사회가 살아난다. 그래서 가정을 지키는 일은 단지 한 집안을 지키는 차원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지키는 일이며,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지키는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에덴동산처럼 기쁨과 사랑이 넘치는 곳이 되기를 원하신다. 오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꼭 사랑을 표현해 보자.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축복해요." 하나님 안에서 부부 관계가 회복되고, 우리의 가정마다 사랑과 기쁨이 다시 살아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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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신춘식 교수와 함께 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선교신학 <한 사람의 일기가 세계 선교를 움직이다 브레이너드가 남… 크리스천헤럴드2026.05.18
    선교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가? 많은 사람은 대규모 집회와 뜨거운 부흥의 현장을 떠올린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선교를 시작하신다. 한 사람의 눈물, 한 사람의 기도,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 사람의 삶을 통해서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선교신학을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젊은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이다. 그의 삶은 짧았고, 그의 사역은 외형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일기는 이후 세계 선교의 흐름을 바꾸는 불씨가 되었다. 브레이너드는 29 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건강이 약했고, 폐결핵으로 고통받으며 사역했다. 그가 섬겼던 곳은 화려한 도시가 아니라 미국 북동부의 인디언 부족 공동체였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고, 문화는 낯설었으며, 환경은 혹독했다. 그가 남긴 기록에는 성공보다 실패, 열매보다 고독이 더 많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일기는 특별하다. 그것이 사역의 보고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영혼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고,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의 글에는 화려한 표현이 없다. 대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과 눈물의 기도가 담겨 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불타오르기를 원한다." "나는 더 거룩해지기를 갈망한다." 이러한 고백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씨름한 흔적이었다.  브레이너드가 세상을 떠나기 전, 그는 에드워즈의 집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에드워즈는 그 곁을 지키며 이 젊은 선교사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가 남긴 일기와 기록들을 정리하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The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1749)로 출판하였다. 이 한 권의 책이 끼친 영향은 놀라웠다. 현대 선교의 문을 연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는 이 책을 읽고 인도 선교를 결심했다. 헨리 마틴(Henry Martyn)은 이 책을 통해 선교사의 길을 선택했다. 짐 엘리엇(Jim Elliot)은 브레이너드의 삶에서 자신의 사명을 발견했다. 한 사람의 짧은 생애와 그가 남긴 일기는 수백 명의 선교사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것은 인간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방식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선교의 영향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결과와 규모로 사역을 평가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 얼마나 큰 열매가 있었는가를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삶은 다른 기준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깊은 헌신을 통해, 한 세대를 넘어 다음 세대를 움직이신다. 특히 주목할 점은, 브레이너드의 영향력이 그의 생전이 아니라 그의 죽음 이후에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살아 있을 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삶의 기록은 이후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하나님은 그의 삶을 즉각적인 성공이 아니라, 지속적인 영향력으로 사용하셨다. 에드워즈 역시 이 사실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단순한 개인 기록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향한 영적 유산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 글을 정리하고 세상에 내놓은 것은 단순한 편집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교의 불씨를 이어가는 신학적 행위였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기도의 능력이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를 다음 세대에 증언하고자 했다. 이 이야기는 오늘 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에도 깊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때로 작은 교회, 제한된 환경,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사역한다. 우리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의문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이야기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작은 삶을 통해 큰 역사를 이루신다. 디아스포라의 삶은 본질적으로 경계선 위의 삶이다. 우리는 미국 사회 안에 살지만 완전히 중심에 속해 있지 않고, 한국적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 안에만 머물 수도 없다. 이 사이에서 느끼는 소외감은 때로 약점처럼 보인다. 그러나 브레이너드의 삶은 그 소외감이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화려하지 않은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낸 삶이, 오히려 더 멀리, 더 깊이 흘러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선교는 한 사람에서 시작된다. 한 사람의 기도, 한 사람의 순종, 한 사람의 눈물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그것은 한 시대를 움직이는 도구가 된다. 브레이너드의 삶은 우리에게 묻는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나의 신앙은 누군가에게 이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지금 서 있는 자리는 작을 수 있다. 우리의 영향력은 제한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작은 삶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하신다. 그 영향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더 깊이 흘러갈 수 있다. 선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로만 측정되지 않는다. 선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낸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삶이 기록되고, 전해지고, 이어질 때, 한 사람의 일기는 세계 선교를 움직이는 불씨가 된다.  한 사람의 기도는 결코 그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헌신은 세대를 건너 이어진다. 그리고 그 삶이 바로 오늘 미국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가 살아가야 할 방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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