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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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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병학 목사의 소통하는 교회 - 소통은 거짓을 막는 진리의 방패다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요근래 한국 사회는 사이비 이단 문제로 깊은 충격을 겪고 있다. 단지 특정 종교 집단의 일탈이나 개인적 피해에 그치지 않고, 정치권과 결탁하여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공공성과 윤리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대통령까지 공식석상에서 사이비 이단의 실태를 언급할 만큼, 그 영향력은 이미 국가적 신뢰를 흔드는 수준에 이르렀다.하지만 정작 우리는 이 문제를 외부의 위협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이비의 문제는 단지 그들만의 일탈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구조적 허점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많은 이들이 사이비에 빠지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신앙심이 약하거나 판단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진지하게 믿음을 추구하던 이들일수록, 사이비의 메시지에 더 쉽게 끌리기도 한다. 이단 사이비들이 던지는 말은 언제나 그럴듯하다.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히 택하셨다”, “지금은 마지막 때이며, 우리만이 참 진리를 알고 있다.” 문제는 그 말들이 기존 교회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갈증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교회는 사람들의 갈증을 잘 모른다. 사이비는 돌봄의 언어로 다가온다. 교회에서 질문하지 못했던 것을 허용해주는 듯 보이고, 오랜 시간 갈증을 가진 채 외로움 속에 나름의 신앙을 지켜오던 이들에게 깊은 관심과 연결감을 제공한다. 처음엔 진짜 공동체처럼 느껴진다. 매일 안부를 묻고, 함께 기도하고,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들 속에서, 신앙인은 자신이 비로소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돌봄은 곧 통제로 바뀌고, 확신은 맹신이 되며, 공동체는 폐쇄적인 울타리로 변질된다.교회는 이 지점에서 침묵해선 안 된다. 많은 경우, 사이비로 넘어간 이들의 발걸음은 이미 교회에서 마음이 떠난 뒤였다. 목회자의 부도덕성과 이중적인 언행, 권위적인 리더십,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폐쇄적인 분위기, 형식적인 양육과 무기력한 성경공부, 사람의 마음을 살피지 않는 훈련. 그 모든 요소가 사람들을 서서히 지치게 만들고, 결국엔 교회를 떠나도록 만든다. 문제는, 그들이 완전히 믿음을 버리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오히려 더 순수하게 하나님을 갈망하기에, 거짓이 진짜처럼 보일 때 그 유혹에 쉽게 붙잡힌다.교회가 놓친 자리는 사이비가 가장 쉽게 뿌리내리는 장소다. 교회 안에서 충분히 돌봄받지 못한 마음, 함께 말씀을 나누고 해석할 기회를 갖지 못한 갈증, 스스로 묻고 답할 수 없었던 침묵의 시간들이 결국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무너지고 만다. “이건 아무에게나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다.” “너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이 말들이 믿음을 갈망하던 사람들에게는 위로처럼 들린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사이비는 결핍을 공략한다. 사랑받지 못했다는 외로움, 이해받지 못했다는 억울함, 말씀 속 진리를 만난 적 없다는 영적 허기. 이 모든 것을 사이비는 채워줄 듯 접근하지만, 결국 바른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오히려 한 사람의 인생을, 한 가족의 미래를, 한 사회의 윤리를 송두리째 무너뜨린다.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교회가 진짜 교회다워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 설교를 듣는 데 그치지 않고 함께 말씀을 질문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자의 리더십은 더 이상 통제가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 성도들 간의 관계는 표면적인 인사로 끝나지 않고, 삶의 구체적인 고통을 함께 나누는 동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질문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의심과 회의가 죄로 취급되지 않고, 함께 답을 찾아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지금 사이비 문제는 단지 법과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교회가 건강해질 때, 그 틈은 사라진다.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 앞에서 서고, 삶 안에서 진리를 살아낼 때, 어떤 거짓도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진짜 복음은 사람을 얽매지 않는다. 두렵게 하지 않는다. 조종하지 않는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교회가 소통을 회복하고, 성경을 깊이 있게 나누며, 신앙이 삶과 연결되는 공간이 될 때, 우리는 다시 희망을 말할 수 있다. 사이비에 대응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규제가 아니라 진짜 교회다. 그리고 그 진짜 교회를 만드는 일은 지금, 여기, 우리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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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6
    [오피니언] 조영석 목사의 생각하며 기도하며 - 연륜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예배 인도를 마치고 내려가기 전에 찬양대 지휘자가 사용할 보면대 하나를 항상 두고 내려간다. 찬양대 앞에 지휘자가 서는 자리에 보면대를 놓되, 잊지 않고 반대로 돌려놓고 내려간다. 지휘자가 지휘 궤적을 확보하기 위해 받침이 없는 위쪽을 자신 앞으로 돌려놓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이처럼 누군가와 함께 해온 시간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발견되는 것들이 있다. 특이하고 독특한 습관들도 함께 한 시간이 오래되면 자연스럽게 눈에 띈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습관들이 있다. 한두 번 보아서는 잘 모르지만 자주 보면 알게 된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나 가족이 서로의 성향과 습관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깊이 알아가는 과정도 같다. 친해지기 전에는 말과 행동을 조심하기에 다 보이지 않지만 가까워지고 편해지면, 그제서야 서로 몰랐던 부분들까지 알게 된다. 좋은 면도, 부족한 면도 알게 되고 그 사람에 대해 깊은 이해가 생긴다. 좋은 일과 슬픈 일을 함께 겪으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야만 비로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신학교를 다닐 때 이런 면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일이 있었다. 수강했던 헬라어 교수가 들려준 자신의 경험담이었다. 그가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을 때 사도바울에 대한 논문을 썼다고 한다. 자료도 많이 찾고 열심히 분석해서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바울의 삶과 신학에 대해 좋은 논문을 쓰기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학과 지도교수가 여간 깐깐하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면밀히 따지는지, 논문을 검증받는 날이면 늘 긴장되었다고 한다. 이 지도교수 때문에 아예 논문주제를 바꿔 다른 교수를 찾아간 학생들도 있었고, 그래도 버티고 끝까지 남은 학생들 중에는 지도교수의 사무실에서 나올 때 분노에 차 있거나, 얼굴이 빨개져서 나오는 모습을 본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보다 바울신학에 대해서는 정평이 있는 교수라서 어려워도 지도를 받기로 했다고 한다. 그동안 준비한 논문을 발표할 차례여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도교수를 찾아 간 그는 질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모든 것에 대해 철저히 준비를 하고 갔다고 한다. 따질 것으로 보이는 것들은 더더욱 꼼꼼하게 준비를 하고, 되려 반문할 질문들도 준비를 하는 등, 각오를 단단히 하고 찾아갔었다고 한다. 철저한 준비가 헛되지 않게 모든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했고, 지도교수가 날카롭게 던진 의문점들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연구 내용을 입증하며 자신의 논리를 펼쳤다고 한다.  어떤 말에도 지지 않고 모두 능숙하게 답변을 하자, 더 이상 질문하지 못하고 고개만 설레설레 젓는 지도 교수를 보며 마음속으로 승리의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바로 그때, 지도교수가 내뱉은 한마디에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참담함을 금치 못하며 방을 나섰다고 한다. 지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다 맞는 말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은 바울답지 않다.” 지도교수의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말한마디에는 그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지도교수가 자신보다 바울을 더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수십 년간 바울을 연구해온 지도교수, 그는 바울의 신학만 아니라, 그의 어법, 필체, 성격, 습관 등등, 그의 글에서 숨소리조차 느낄 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 박사과정 논문을 쓰기 시작한 그가 바울을 연구한지는 불과 1-2년 남짓. 수십 년간 바울을 공부하고 연구하고 함께 지내온 사람에게 이제 바울과 동행한지 몇 해 안된 사람이 바울에 대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도 같다. 오랜 세월동안 주님과 동행한 나날들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시간이다. 깊은 교제 속에서 쌓아온 주님에 대한 경험과 지식, 주를 아는 마음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귀하다. 주님과의 오랜 사귐은 이처럼 신앙의 성숙으로, 연륜으로 남는 것이다.“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베전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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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5
    [오피니언] 이창남목사의 성탄 메시지 "다시 성탄의 기쁨으로 경배하는 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2025년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는 또 한 해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성탄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성탄은 화려한 계절의 장식이나 익숙한 이야기로 소비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에서, 권력이 아닌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은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분의 오심은 세상이 기대하던 방식이 아니었고, 지금도 여전히 세상의 계산과는 다른 길입니다.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밝아 보이지만, 동시에 깊은 어둠을 품고 있습니다. 기술은 발전했지만 관계는 얕아졌고, 정보는 넘치지만 진리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교회 또한 이 거센 흐름 속에서 본질을 지키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은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성탄은 다시 묻습니다.“너희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성탄의 선언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단지 한 날의 기념으로 끝나지 않고, 교회를 통해 오늘도 세상 가운데 비추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성탄은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어떤 삶으로 세상 속에 서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특히 미주 이민 교회는 지난 세월 동안 이 땅에서 복음의 등불을 지키는 사명을 감당해 왔습니다. 낯선 문화와 언어, 수많은 도전 속에서도 교회는 예배의 자리를 지켰고, 다음 세대를 품었으며, 공동체의 중심으로 서 왔습니다. 이 모든 여정의 중심에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성탄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성탄은 교회가 세상의 빛이 되라고 주어진 계절입니다. 더 크게 말하기보다 더 낮아지고,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깊이 사랑하며, 더 빨리 판단하기보다 더 오래 기다리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증언하라는 부르심입니다. 그 부르심 앞에서 교회와 성도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2025년 성탄을 맞으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고백을 붙들기 원합니다.어둠은 여전히 짙지만, 빛은 이미 오셨고,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이 성탄이 각 가정과 교회, 그리고 미주 교계 위에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도, 오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으로 성탄의 기쁨을 세상 속에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어둠에 빛이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그 빛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십니다.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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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4
    [오피니언] 민경엽 목사의 성탄 메시지 - 참 빛으로 찾아온 성탄절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어떤 죄수가 감옥에 갇혀서 조그마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한없이 오랫동안 내다보고 있다.  그의 등 뒤로는 짙은 어둠뿐이다.  감옥이 힘든 이유는 그 죄수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어둠이 너무나 깊기 때문이다.  온통 어둠이 그를 지배하고 있다.  이 죄수의 등에서 두꺼운 어둠이 그를 짓누르고 있다.  그러니 이 죄수가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창문은 그의 유일한 희망이고, 그렇게 들어오는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는 언젠가 자기에게도 그 빛으로 가득한 삶이 주어지기를 바라며 창문 밖의 세상을 찬란한 빛을 응시한다.  현재는 우크라이나 땅이 된 폴타바에서 태어난 19세기 러시아의 사실주의 작가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야로센코의 <죄수>라는 그림이다.지금은 고인이 된 신영복 교수는 정치적인 이유로 감옥에서 20년 2개월을 살았다.  그가 수감 생활 10년이 되었을 때 어떤 재소자가 자살하였다.  운동시간에 주운 유리조각으로 동맥을 끊은 것이다.  그도 20년 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끊임없이 죽고 싶었다.  그러나 자살하지 않았다.  그가 자살하지 않은 이유를 그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밝혔다.  그 이유는 햇볕 때문이었다.  겨울 햇볕은 비스듬히 벽을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서 최대의 크기가 되었다가 맞은편 벽을 타고 창밖으로 나갔다.  길어야 두 시간이었고, 가장 클 때가 신문지 크기였다.  신문지만한 햇볕을 무릎 위에 받고 있을 때 그는 따스함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 이유를 거기에서 찾았다.  신문지 크기의 햇볕만으로도 세상에 태어난 것은 손해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작은 햇볕이라도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받지 못했을 선물이 아닌가.  그래서 살았다.교회는 성탄절 전의 4주간을 대림절로 지킨다.  대림절은 Advent라고 한다.  라틴어의 adventus에서 온 말로 로마 황제와 같은 아주 소중한 분의 방문을 기다린다는 의미이다.  교회가 대림절을 지키는 이유는 초림하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First Advent)를 기억하고 기념하기 위함이지만 재림하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Second Advent)를 사모하며 기다린다는 의미도 있다.  하나님은 한 아기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흑암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큰 빛이 비치게 하셨다.  그 아기는 세상 사람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초라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셨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담당할 수 있으시다.  그 분은 기묘자로 인생의 딜레마를 해결해 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능력 있게 모든 문제를 푸시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영원의 세계까지 이끄시며, 평강의 왕으로 온전한 평화를 세상에 주시는 분이시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한 아기가 가진 생명, 영생을 사람들의 참 빛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빛이 임하자 노예 상인이었던 존 뉴톤 같은 악한 사람도 개과천선하여 목사가 되고, 세계인이 가장 애창하는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작사하였다.  이 빛이 임하여 존 뉴톤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  20세기의 기독교 지성 C. S. 루이스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묘지에 묻히며 자신의 묘비명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이 기독교를 믿는다.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태양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날에도 떠오르지만 먹구름으로 가려 볼 수 없는 날에도 떠오른다.  그것이 기독교이고, 참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 성탄절 사건이다.  인간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만 참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다 내려지는 축복을 경험한다.  그런데 더 좋은 것은 참된 빛을 통하여 다른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된다는 데 있다.  보되 올바르게 보고 균형 있게 보고 참되게 본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권세다!그런데 이것은 단지 우리의 상상이 아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텐트를 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 삶의 마당에 텐트를 치고 들어오신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잠깐 들렀다 가시는 분이 아니라 삶의 한 복판에 들어오셔서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우리의 아픔 속에 머무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눈물 속에 동행하셔서 빛으로 가득한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세상의 기준과 달리 누추한 우리 인생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에게는 은혜로 오시고, 방황하는 인생에게는 진리로 오셔서 참된 용기와 지혜로 살게 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사모하는 마라나타(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성도가 되게 하신다.  성탄의 계절을 맞아 야로센코의 죄수의 심정으로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한다.  그 빛이 비춰주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생임을 갈수록 깨닫는다.  나야말로 그 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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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43
    [오피니언] 이영선 목사의 성탄 메시지 - 성탄, 마음이 다시 향할 때 믿음은 이어진다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성탄절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다. 성탄은 끊어진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신 사건이다. 하늘과 땅이 연결된 날이며, 동시에 세대와 세대가 다시 이어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드러난 날이다.구약의 마지막 말씀인 말라기 4장 5–6절은 메시아의 오심을 이렇게 예고한다.“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하나님은 마지막 때의 회복을 새로운 제도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마음의 회복으로 말씀하신다. 특히 세대 간에 멀어진 마음이 다시 향하는 것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핵심임을 분명히 하신다.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다음세대의 위기는 단순한 출석 감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앙이 관계 속에서 전해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은 지식으로만 계승되지 않는다. 신앙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삶을 통해 전해진다.성탄의 하나님은 책이나 명령으로 오지 않으셨다. 아기의 모습으로, 낮아진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이는 다음세대를 향한 분명한 메시지다. 정죄보다 공감, 지시보다 동행이 신앙을 잇는 길이라는 것이다.먼저 기성세대의 마음이 다음세대를 향해야 한다. “왜 믿지 않느냐”는 질문보다 “함께 걸어가자”는 손 내밈이 필요하다. 동시에 다음세대 역시 이전 세대를 단절의 대상으로 보기보다, 기도와 헌신으로 신앙의 길을 지켜온 증인으로 존중할 필요가 있다.성탄은 겸손의 절기다. 하나님조차 낮아지셨다면, 우리는 서로 앞에서 마음을 열 수 있다.마음이 향할 때, 믿음은 이어진다.2025년 성탄절을 맞아,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아버지의 마음이 자녀에게로, 자녀의 마음이 다시 부모에게로 향하는 작은 회복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이것이 성탄의 복음이며, 다음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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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진유철 목사의 성탄 메시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며”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낮고 낮은 땅에 임하신 성탄절을 기념하며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보내 주셨기에 우리에게 성탄절은 감사와 기쁨의 절기임이 분명합니다. 세상도 성탄절이 가까워지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모임으로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성탄의 본질은 기쁨으로만 가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하여 낮고 낮은 땅 위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과, 그분이 그렇게 오심은 우리의 죄를 청산하기 위해 십자가로 죽으실 운명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만약 우리를 위한 그분의 철저한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헌신적 사랑이 빠진다면, 우리의 성탄절은 예수님 없는 세상의 성탄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성탄절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이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성탄절이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족과 친지가 모일 때마다 그 자리의 주인이 예수님이 되시고, 주변의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빛이 비추어지고,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님의 겸손이 나타나기를 축복합니다.이처럼 우리 삶에 찾아오신 예수님은 이제 영광의 구세주로 다시 오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첫 번째 성탄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처럼 다시 오심의 예언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매일매일을 예수님과 동행하며 Not I, But Christ(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믿음으로 살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그때, 반드시 잘했다 칭찬하시며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믿음입니다.사랑하는 성도님들의 2025년 성탄절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고대하며, 끝까지 그분과 동행하는 참된 기쁨과 승리의 절기 되시기를 다시 한번 기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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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김은목 목사의 성탄 메시지 - 다시 성탄의 기쁨으로 경배하는 교회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2025년은 유난히 경기가 어려웠던 한 해로 기억됩니다.어느 기사에서는 LA 지역의 식당들이 하루에 하나씩 문을 닫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탄의 계절인 12월에 접어들면서 도로에는 다시 차량이 늘어나고, 식당과 상가들도 조금씩 예전의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습니다. 거리의 장식과 선물, 그리고 서로를 향한 위로와 격려 속에 따뜻함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이 만들어 내는 연말의 분위기일 것입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그러나 성탄의 본질은 그보다 더 깊고 분명합니다.성탄은 하나님께서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을 선포하신 사건입니다.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역사 속에 분명히 드러난 날이 바로 성탄입니다.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증언합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천사들은 이 놀라운 소식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성탄은 하나님께 영광이 회복되는 사건이며, 동시에 이 땅에 참된 평화가 임하는 사건입니다.이 위대한 소식 앞에 가장 먼저 경배한 이들은 종교 지도자나 종교인 혹은 세상의 화려한 권세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별을 따라온 동방의 박사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일상의 자리였던 들판을 떠나 아기 예수를 찾아왔고, 박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최고의 예물을 드리며 경배했습니다. 이처럼 성탄은 하나님이 부르실 사람들을 경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교회는 바로 이 경배에서 시작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프로그램이나 조직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무릎 꿇은 예배자들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생명은 언제나 예배에 있으며, 교회의 중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2025년을 살아가는 오늘의 교회는 여러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인본주의, 물질만능주의, 세속주의, 극단적 이기주의가 확산되며, 탈기독교를 넘어 탈종교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앙은 점점 개인의 선택 사항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단순한 시대 변화라기보다, 교회가 다시 본질을 점검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입니다.이때 교회의 해답은 더 빠른 대책이나 더 세련된 전략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교회는 다시 성탄이 말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탄은 교회가 다시 교회됨을 회복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께 교회의 주권을 돌려 드리고, 복음의 본질을 회복한 경배와 순종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계절입니다.그래서 성탄의 계절은 교회가 다시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이 모든 고백을 한마디로 담아내는 말이 바로 “Merry Christmas”입니다.우리가 이 계절에 담대하게 “Merry Christmas”를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적 인사가 아니라, 신앙의 고백입니다. 하늘에는 영광을 돌리고, 땅에는 평화를 전하기 위해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동방의 박사와 들판의 목자들처럼 다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경배하겠다는 고백입니다.성탄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2025년 성탄이 우리 모두에게 다시 복음의 기쁨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교회가 복음 위에 바로 설 때, 세상은 다시 성탄의 기쁜 소식 앞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그분이 우리의 구주이시며, 교회의 주인이십니다.이 성탄의 은혜로 섬기시는 교회와 가정,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시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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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심상은 목사의 성탄 메시지 - 이제는 다 좋다 Now All is Well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약속대로 때가차매 유대땅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예수님이 태어 나셨습니다.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그 아기의 이름은 예수라고 했고 그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마1장 21절)라고 했습니다.  마태와 누가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의 탄생의 환경에 대해서 말하거나 도덕적 교훈을 다루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태어나셨는가 신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베들레헴에 난 아기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습니다.이 땅에 예수님 오심이 너무 좋아서 외친 말이 “Now all is well"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오셨으니 “자, 이제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시간이 흐르면서 ”Nowell"로 바뀌었고 그것이 “Noel"로 불리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성탄절이 바로 노엘의 의미입니다.예수님 오심이 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었다는 말이 “노엘”입니다.인간이 만든 신들은 인간에게 오지 않습니다. 인간들이 그 신들에게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증표입니다.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시입니다. 불쌍하고 연약한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는 열심히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확인시켜주시는 날입니다.우리가 힘들고 지쳐서 일어날 힘이 전혀 없을 때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고통속에 눈물 흘리고 있을 때에 우리눈물 닦아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가지 어려운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고 있습니까?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 좋습니다. 성탄절에 예수님 만나보세요. 희망이 생겨납니다. 새 힘이 생겨납니다. 살아납니다. 회복됩니다. 잘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 오셨으니 이제 다 좋습니다.  NOE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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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황순원의 10가지 감사노트 - 12월, 송년의 계절에 드리는 감사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1 오늘도 새날 주시고 오늘 주실 은혜와 주님이 들려주시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하루를 시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이제 새 옷으로 갈아입고 새날이 오면 달려갈 것을 준비하며 감사를 드립니다.3 기도 시작할 때 "주님은 누구신가요? 나는 누구인가요?" 두 가지 질문을 할 때마다 주님이 자신을 새롭게 소개해 주십니다. "나는 너의 남편이야" 라고 하며 다가오실 때마다 주님의 아내로서 입고 있는 옷들이 얼마나 더러워지고 찢어졌는지 보여 주시는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로 고백하며 감사를 드립니다.4 "나행한것 죄뿐이니 주 예수께 비옵기는 나의 몸과 나의 맘을 깨끗하게 하옵소서 물가지고 날 씻든지 불가지고 태우든지 내 안과 밖 다 닦으사 내 모든 죄 멸하소서"얼마 만에 불러보는 찬송인가? 새삼스레 가사가 새벽 고요를 깨고 입술로 나오자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5 기도노트에 기록된 내용들 중에는 유명해지지 말자라는 표어가 자주 적혀 있습니다. 유명해지는 순간부터 사단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단의 공격을 받아 피투성이 된 나의 영혼의 상태를 보여 주시니 지금이라도 감사합니다.6 성령의 역사는 매우 조용합니다. 떠들지 않지만 변화를 줍니다. 소리 없이 일어나지만 평화롭습니다. 하나가 됩니다. 미소가 흐릅니다. 얼굴만 보아도 안도감을 줍니다.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하며 감사를 드립니다.7 "내 어둔 눈 밝히시니 참 기쁘고 고마우나 그보다 더 원하오니 정결한 맘 주옵소서" 라는 구절을 부르며 묶은 때를 벗겨 주사 정결케 되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누리게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8 "정결한 맘 그 속에서 신령한 빛 비치오니 이러한 맘 나 얻으면 눈까지도 밝으리라" 어두워서 보지 못하여 헤매던 나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서 눈을 밝혀 주리라 약속해 주셨으니 기대하며 감사합니다.9 "못된 행실 다 고치고 악한 생각 다 버려도 주 앞에서 정결 타고 자랑 치는 못하리라" 부르고 또 부르며 나는 용서받은 죄인임을 뼈절이게 느끼며 감사를 드립니다.10 이제 막이 내려가고 있는 오늘 일 년 동안의 사역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성령의 엑스레이에 나의 속사람을 정확하게 보여 주사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모습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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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The letter 18 김광근 - 평강의 왕이 다스리시는 삶 크리스천헤럴드2025.12.20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촌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 이사야 9장 7절하나님께서는 불안과 위협 속에 떨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한 아기의 탄생을 약속하시며 그 이름을 평강의 왕'이라 부르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이끄시는 진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평강, 즉 '샬롬'은 단순히 상황이 편안해질 때 느끼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분의 다스림이 내 삶에 이루어질 때 찾아오는 완전한 질서이자 조화입니다.그렇기에 평강은 환경이 어떠한가보다 '누구의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의 왕좌에 앉으실 때, 비로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찾아옵니다.우리가 평강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종종 내가 내 인생의 왕이 되려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순간 염려가 틈을 타고 두려움이 마음을 지배하게 됩니다. 진정한 평강은 버티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항복에서 시작됩니다. 평강의 왕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릴 때 그분의 통치가 우리 안에 무너진 질서를 세우고 평강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 통치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리라"는 약속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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